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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9] 사무엘 베케트 『엔드게임』 : 부조리극의 회색조(Grey Tone) 톤앤매너와 정적(Static) 앵글의 효과

by 필름회색소음 2025. 12. 27.

1. 프롤로그: ‘아직도 안 끝났어?’

살다 보면 가끔 그런 날 있지 않아? 가슴이 턱 막히는 순간 말이야. ‘언제쯤이면 나도 좀 숨 좀 쉴 수 있을까?’ ‘난 도대체 언제까지 이 상태로 굴러가야하는거지?’ 멋진 삶을 떠올리다가도, 결국 다음 날 알람에 눈을 뜨면 어제와 같은 하루가 다시 시작돼 버리잖아.

뭐... 박차고 나갈 용기만 있으면 될 것 같다가도, 막상 발목을 잡는 건 나 스스로의 책임이고 현실이 이어지지. 지금 당장 살아야 하는 오늘이니까. 그래서 자꾸 관성처럼, 그냥 굴러가게 되는 것 같아.

 

사무엘 베케트의 『엔드게임』은 그 감각을 아주 잔인하게 고정시켜. 장님에 앉은뱅이인 , 떠난다고 말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하인 클로브. 둘은 서로를 밀어내면서도, 결국 같은 방 안에서 끝나지 않는 막판을 계속해.

 

오늘 내가 포착하고 싶은 장면은 사건 자체가 큰 장면은 아니야. 클로브가 창문 쪽으로 가서 밖을 확인하고도 아무것도 없음을 다시 확인한 뒤, 말없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그때의 무기력한 등을 찍고 싶어. 희망이 꺼진 게 아니라, 희망을 켜는 손동작 자체가 사라져 버린 사람의 등 말이야.

[시놉시스 | 끝낼 수 없어서 계속하는 사람들]
종말 이후처럼 보이는 폐쇄된 방이 배경이야. 휠체어에 앉아 군림하듯 명령하는 , 그의 명령을 수행하지만 점점 닳아가는 클로브. 그리고 무대 한쪽, 쓰레기통 속에 반쯤 갇힌 채 살아 있는 햄의 부모 나그이 등장하지.

바깥은 죽어 있고, 남은 것들은 줄어들어. 그들은 서로를 괴롭히기도 하고, 오래된 기억을 꺼내기도 하며, 죽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매듭지어지진 않아. 클로브는 짐을 챙겨 문 앞까지 가는 듯하지만, 끝내 방을 벗어나지 못한 채 멈춰.

이 작품은 끝을 향해 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끝을 피해 같은 자리에 머무는 이야기야.
[오늘의 포인트]
1) ‘밖을 본다’는 행동이 탈출이 아니라 확인 의식처럼 보이게
2) 넓은 프레임 속 작은 인간을 오래 붙잡아, 관객이 먼저 답답해지게
3) 납빛 조명과 건조한 생활 소리, 그리고 완전한 침묵으로 방의 공기를 만들기

2. Scene Reading: 창문은 희망이 아니라 벌점표다

나는 개인적으로 클로브가 창문을 보러 가는 장면이 숨 막혀. 이유는 단순해. 그건 ‘탈출’이 아니라 탈출 불가능을 스스로 다시 찍는 행위처럼 보이거든.

그는 방의 끝으로 가고, 뭔가를 끌고, 올라가서 봐. 그리고 내려와서 보고하지. 별것 없다고...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밖에 뭐가 있냐 없냐’가 아니야. 클로브가 내려오는 그 순간, 관객은 느끼게 되지. 이 방은 감옥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습관이 되어버렸구나 하고...

 

그래서 오늘의 씬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반복이 사람을 어떻게 닳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될 거야. 똑같이 움직이고, 똑같이 보고, 똑같이 돌아오는 과정에서 체온이 내려가는 느낌? 그게 엔드게임의 공기가 될 거야.


어두운 회색 방 안에 녹슬고 찌그러진 금속 쓰레기통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차가운 질감과 쓸쓸한 유머가 느껴지는 스틸라이프 장면.


3. Director’s Cut: 납빛 조명, 텅 빈 프레임, 그리고 ‘견디기’의 촬영

이 장면은 멋있게 찍으면 망해! 오히려 볼 게 없어서 더 괴로운 화면이어야 하지. 관객이 ‘왜 이렇게 오래 보게 하지’라며 불편해하는 그 지점이, 이 작품의 진짜 정직함이거든.

🎥 Camera Work: 움직이지 않는 시선으로 방을 ‘감금’하기

• 메인 앵글: Static Wide Shot. 카메라를 절대 흔들지 않아. 관객이 도망갈 구석이 없게.
• 렌즈 감각: 24mm 정도의 살짝 넓은 화각으로 공간의 빈자리를 키울 거야. 인물은 작게, 벽과 바닥은 크게. 사람이 방에 먹히는 느낌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아.
• 인물 배치: 클로브가 창문으로 갈수록 프레임 상단의 창이 더 압도하게 배치되면 좋을 것 같아. ‘하늘’이 아니라 ‘닫힌 구멍’처럼 보여야 하거든.
• 시간 처리: 걸어가는 과정은 편집으로 생략하지 말고, 가능한 한 그대로 둘 거야. 클로브의 절뚝임이 장면의 공기압이 되게 말이지.
• 예외 컷: 딱 한 번만, 클로브가 제자리로 돌아와 멈출 때 아주 미세한 줌으로 등 쪽을 가까이 당겨볼 거야. 사건이 아니라 포기한 몸의 질감을 보여주는 용도로. 하지만 이 장면은 선택사항으로 두고, 마음에 안 들면 편집할 거야.

💡 Lighting: 납빛(Lead)으로 낮도 밤도 아닌 시간을 만들기

• 톤: 따뜻함 금지. 생기 금지. 회색이 공기처럼 깔리게. 흐린 날 오후 4시의 애매한 무게감.
• 그림자: 선명한 그림자 대신 흐릿한 그림자(Soft Shadow). 대비가 세지면 드라마가 생겨. 여긴 드라마를 만들면 안 돼.
• 창문 빛: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은 구원처럼 예쁘면 안 돼. 먼지에 씹히는 빛. 공기 중 입자가 보이게 해서, 빛조차 숨이 막히게.
• 피부 톤: 사람 얼굴이 혈색 좋게 나오면 실패. 약간 창백하게, 약간 식어 보이게. 살아 있는 얼굴이 아니라 버티는 얼굴로.

🔊 Sound: 알람과 생활 소리와 무음, 세 가지로만 방을 닫기

• 오프닝 알람: 듣기 싫게 날카로운 자명종. ‘하루 시작’이 아니라 형벌 시작처럼.
• 생활 소리 확대: 슬리퍼 끌림, 사다리 삐걱임, 휠체어 금속 마찰, 쓰레기통 뚜껑 닫히는 둔탁함, 마른 비스킷 부스러짐. 이런 소리들을 의도적으로 선명하게. 소리가 또렷할수록 방이 더 비어 보이거든.
• 아주 낮은 험(선택):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웅—’ 하는 기계음. 정전도 아닌데 전기가 썩은 느낌이 나게.
• 무음의 칼날: 누군가 말하다 멈출 때, 완전한 정적에 가까운 무음. 그 침묵이 대사보다 크게 때리게.

[이번 장면의 핵심 쇼트]
- 고정 와이드 + 긴 이동: 지루함이 곧 공포가 되는 방식
- 창문 확인(멀리서): 감정 대신 ‘절차’만 보이게
- 생활 소리 확대 + 무음: 비어 있는 세계의 생활감 만들기

높은 천장의 회색 방 안에서 휠체어의 인물과 서 있는 인물이 거대한 빈 벽에 압도된 채 놓인, 시간감각이 사라진 듯 답답한 와이드 장면.


4. Editor’s Note: 불행이 웃기다는 말의 정체

이 작품은 희망을 팔지 않아. 대신 이렇게 말하는 느낌이지. ‘그래, 원래 잘 안 끝나. 그러니까 오늘은 오늘만 버텨.’

가끔은 이런 인정이 더 현실적이더라. 텅 빈 위로보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말이 더 힘이 될 때가 있으니까.

그래서 오늘의 클로브는 영웅이 아니야. 다만 창문 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 확인하고, 또 내려와서, 또 자리에 앉는 사람. 그 등짝이 너무 인간적이어서 나는 오래 보게 돼.

 

오늘도 내가 ‘끝나지 않는 막판’을 두고 있다면, 적어도 스스로에게 이건 말해주고 싶어. 포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 살아 있어서 그 자리에 있는 거라고 말이야.

 

[Scene Keyword]

Endgame, Stalemate, Trash Cans, Gray Light, Static Wide Shot, Long Take, Existential Void

 

 

 

작품 : Samuel Beckett, Endgame (Play)
※ 본 글은 장면 해석·비평 목적의 오리지널 콘텐츠이며, 원문 대사 직인용은 최소화하고 내용은 요약·의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