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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34] 고선웅 『리어외전』 : 비극을 희극으로 비트는 광각 렌즈(Wide Angle)의 왜곡과 속도감

by 필름회색소음 2026. 1. 3.

1. 프롤로그: 웃음이 먼저 나오면, 이미 무너진 거다

가끔 그런 날 있지 않아? 진짜로 속상한 일이 닥친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 웃음이 먼저 나오는 날 말이야. 설마 웃겨서 웃었을까... 사실,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슬퍼할 타이밍조차 놓쳐버리는 순간인 거지. 그 웃음은 낙천도 위로도 아니고, 그냥 ‘정신이 버티는 방식’에 가깝겠지.

 

고선웅의 『리어외전』은 바로 그 웃음을 무대 위에 올려놓는 작품인 듯 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고통을 천천히 씹어 삼키는 비극이라면, 『리어외전』은 그 고통을 한 번에 삼켰다가 기침처럼 터뜨려 버려. 인물들은 품위를 지키며 무너지는 대신,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더 빠르게 무너져. 그래서 우리는 웃는데, 웃다가 갑자기 목이 잠기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거지.

 

그래서 오늘 내가 카메라에 담고 싶은 건 ‘장엄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장엄함이 망가지는 순간의 얼굴이야. 광각 렌즈(Wide Angle)로 가까이 들이대서, 욕망이 얼굴에서 어떻게 부풀어 오르고 일그러지는지 보여주고 싶어. 멀쩡한 말이 아니라, 멀쩡한 척하는 표정이 제일 먼저 무너지거든.

[시놉시스 | 왕의 질문 하나가 집안을 산산이 흩뜨릴 때]
현대와 고전의 기운이 뒤섞인 무대. 늙은 왕 리어는 딸들에게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근거로 권력과 재산을 나누려 한다. 첫째와 둘째는 말을 과하게 꾸며 얻을 것을 얻고, 막내 코델리아는 말의 과장을 거부하며 짧게 멈춘다.
그 멈춤이 방아쇠가 된다. 리어는 스스로 만든 규칙에 갇혀 막내를 내치고, 집안은 순식간에 거래와 배신의 장으로 바뀐다. 원작이 ‘추락의 무게’를 보여준다면, 이 작품은 ‘추락의 속도’를 밀어붙인다. 누군가는 재빨리 편을 갈아타고, 누군가는 계산을 놓치고, 누군가는 정신이 무너진다.
모든 게 지나간 뒤 남는 것은 거창한 교훈이 아니라, 텅 빈 웃음이다. ‘그래서 어쩌겠어’ 같은 허무가 무대 바닥에 남아, 관객 발밑에서 계속 끈적하게 붙는다.

오늘 내가 찍고 싶은 컷폭풍우 속 광야 장면이야. 나는 리어를 ‘비극의 영웅’으로 세우지 않을 거야. 오히려 비에 젖은 얼굴을 화면 가까이 밀어 넣고, 광각의 과장으로 코끝과 눈빛을 터무니없을 정도로 크게 만들 거야. 배경은 휘어지고, 수평은 무너지고, 인물만 과도하게 앞으로 튀어나오지. 그 순간 리어는 위엄이 아니라 망가진 인간의 생생함으로 남게 될 거야.


2. Scene Reading: ‘울지 않는’ 방식으로 더 아프게 만드는 연출

리어외전』이 날카로운 지점은, 슬픔을 진열하지 않는다는 데 있어. 누군가 무너져도 긴 호흡으로 울음을 붙잡지 않고, 바로 다음 상황으로 밀어 넣지. 관객에게 ‘감상할 여유’를 주지 않는 거야. 그래서 마음이 따라가기도 전에 몸이 먼저 불편해져. 사실, 그 불편함이 이 작품의 진짜 감정일 것이고.

 

인물들은 생각을 오래 굴리지 않아. 욕망이 들어오면 바로 튕겨나가는 반응이 먼저야.

동선은 직선으로 치고 나가고, 말은 서로를 덮어버릴 정도로 겹쳐. 그러다 갑자기 한 순간 정지처럼 얼어붙기도 해. 그 급격한 전환이 현대의 감각과 닮아 있어. 우리는 너무 자주 ‘정리’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잖아. 이 작품은 그 넘어감을 웃음으로 포장해 놓고, 포장 밑에서 서늘한 바닥을 보여줘.


찌그러진 권력 : 진흙 웅덩이에 반쯤 잠긴 싸구려 종이 왕관이 빗물에 일그러지며 벗겨진 금빛과 젖은 판지가 드러나는 차갑고 씁쓸한 매크로 장면.


3. Director’s Cut: 뷰파인더가 감당 못 할 만큼 들이대기

이 작품을 영상으로 옮길 때의 목표는 ‘깔끔한 미장센’은 아니야. 오히려 정돈된 화면을 일부러 망가뜨려야 해. 왜냐하면 『리어외전』은 질서가 붕괴하는 과정을 ‘폼’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니까. 그래서 나는 렌즈, 빛, 소리 전부를 ‘과잉’의 방향으로 밀어붙일 거야. 단, 과잉은 난잡함이 아니라 계산된 공격이어야 해.

🎥 Camera Work: 초광각의 과장과 핸드헬드의 압박

나는 14mm~16mm초광각을 기본으로 깔 거야. 카메라를 배우 코앞까지 들이대면, 얼굴의 중심은 과하게 커지고 주변은 밀려나지. 이 왜곡은 ‘인물의 내면이 튀어나오는 느낌’을 만들게 돼. 왕의 위엄이 아니라 왕의 욕심이 먼저 보이게 되는 거야.

 

움직임은 삼각대보다 핸드헬드가 어울려. 다만 무작정 흔드는 게 아니라, 배우의 동선에 늦게 따라붙는 식으로 ‘한 박자’ 뒤처지게 갈 거야. 관객이 안정감을 느끼기 직전에 화면이 다시 틀어지게 만들면, 웃음이 나다가도 바로 불안이 올라오겠지? 필요할 땐 급격한 푸시 인으로 거리감을 무너뜨리고, 필요할 땐 과감한 와이드로 인물을 구석에 던져버릴 거야. 왕이든 딸이든, 화면 속에서 존엄하게 중심을 차지하는 순간은 거의 없게 만들 생각이야.

💡 Lighting: 번쩍임과 하드 콘트라스트로 ‘정신의 균열’ 찍기

폭풍우 장면은 ‘웅장한 자연’이 아니라 ‘찢어진 의식’으로 보이게 할 거야. 그래서 지속광으로 예쁘게 만들지 않고, 스트로보나 순간적인 플래시 계열의 빛으로 ‘끊긴 화면’처럼 보이게 만들 거야. 번쩍이는 순간마다 표정이 정지된 사진처럼 잘려 보이면, 관객은 인물의 감정을 따라가기보다 ‘망가지는 과정’을 목격하게 될 거야.

 

또 하나는 하드 라이트야. 얼굴의 주름, 땀, 입가의 경련이 숨지 않도록 대비를 세게 줄 거야. 그리고 배경에는 인물보다 더 큰 그림자를 만들 거야. 인물은 작아 보이는데 그림자만 커지면, 그 사람의 욕망이 몸집을 키워버린 것처럼 보이거든. ‘내가 나를 조종하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든 욕심이 나를 끌고 가는 느낌’이 만들어지지.

🔊 Sound: 말은 칼이 아니라 ‘충돌’로 들려야 한다

리어외전』의 대사는 노래처럼 매끈하게 들리면 실패야. 나는 대사를 ‘음악’이 아니라 ‘충돌’로 처리할 거야. 말이 말 위로 덮이고, 숨이 끊기고,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문장이 밀려들어오는 느낌. 그래서 마이크는 숨소리와 침 삼키는 소리까지 가까이 잡을 거야. 웃긴 말인데 숨이 거칠게 섞이면, 웃음이 갑자기 불편해지거든.

 

폭풍우의 비는 ‘분위기’가 아니라 ‘거슬리는’ 방향으로 가야 해. 양철을 두드리는 듯한 비음, 바람이 문틈을 긁는 소리,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저역의 굉음. 그리고 중요한 건 ‘끊기’야. 소리가 계속 이어지면 관객은 아마도 익숙해지겠지. 나는 중간중간 과감하게 소리를 턱 끊어버리고, 그 끊긴 자리에서 관객이 자기 숨소리를 듣게 만들 거야. 그 순간이 제일 선명하게 남도록 말이야.


광기의 폭풍우 : 폭우 속에서 광각 왜곡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노왕이 빗방울이 얼어붙은 듯한 강한 플래시 아래 비명을 지르는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클로즈업 장면.


4. Editor’s Note: 내 표정을 한 번 ‘광각’으로 보면, 숨이 트인다

리어외전』이 주는 묘한 해방감은 여기서 와. ‘세상은 원래 이 정도로 우스운 곳’이라는 사실을 너무 당당하게 보여주거든. 왕도 결국은 감정 과잉인 사람이고, 가족도 결국은 거래를 하는 사람이고, 정의도 결국은 타이밍을 놓치면 소용없어지는 말이야. 그걸 정색하고 말하지 않고, 일부러 떠들썩하게 보여주니까 더 아프고 더 시원하지.

 

나도 가끔 내 고민이 너무 무거워질 때가 있잖아. 그럴 땐 마음속에 초광각을 하나 끼워 봐. 내 표정이 과장되게 커지고, 내 근심이 우스꽝스럽게 튀어나오면, 그제야 ‘아, 내가 나를 너무 근엄하게 다뤘구나’ 싶어 지겠지.

 

리어외전』은 그걸 무대 전체로 해버리는 작품이야. 폼 잡는 슬픔 말고, 살아남는 웃음 쪽으로...

 

[Scene Keyword]

Lear Side Story, Koh Sun-woong, King Lear, Tragicomedy, Wide Angle Lens, Distortion, Handheld, Strobe Lighting, Grotesque, Kitsch

 

 

 

작품 : 고선웅, 리어외전 (연극/희곡)
※ 본 글은 장면 해석·비평 목적의 오리지널 콘텐츠이며, 원문 인용은 최소화했습니다.
※ 본문은 연극 작품의 연출·촬영·사운드 관점 분석을 위한 글이며, 폭력적 행위를 미화하거나 조장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