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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42] 에드워드 알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 환상이 걷히는 새벽, 하드 라이트가 남기는 ‘잔해’의 미장센

by 필름회색소음 2026. 1. 7.

1. 프롤로그: 파티가 끝난 뒤, 불 켜진 거실에서 남는 얼굴

오늘은 퇴근 후 방에 들어오는 순간 느꼈어. 오늘 하루 참... 길었다는 걸. 밖에서는 멀쩡한 척 웃고 떠들며 사람들과 맞춰주다가, 퇴근 후 현관문 닫고 불을 켰는데 매일 보는 환경이 유독 낯설게 느껴지는 날 있잖아? 이런 날은 밝아진 조명 아래서 숨겨뒀던 피로감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보이더라고. 아까까지는 괜찮았던 표정이, 지금은 피곤하고 무표정하게 굳어 있는 거지.

 

에드워드 알비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바로 그 순간을 밤새 늘려놓은 작품같아. 중년 부부 조지마사는 손님을 불러놓고도 서로를 배려하지 않지. 대화는 자꾸 칼끝으로 바뀌고, 농담은 모욕으로 착지하고, 사소한 말이 관계 전체를 흔들기도 해. 중요한 건, 싸움의 이유가 ‘큰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야. 오히려 평소에 쌓인 습관, 말버릇, 서로를 시험하는 방식이 점점 더 큰 상처를 만든다는 걸 보여주거든.

 

그래서 오늘 연출해보고싶은 장면은 ‘새벽의 빛(Dawn Light)’이야. 새벽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정직하고, 정직한 만큼 잔인한 것 같아. 환상을 덮어주던 어둠이 빠지고, 남은 표면만 또렷해지는 시간. 나는 그 하드 라이트가 거실의 난장판과 인물의 얼굴을 똑같이 드러내는 순간을, 과장 없이 정확하게 찍고 싶어.

[시놉시스 | 새벽까지 이어지는 ‘게임’,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
대학 교수 부부인 조지마사는 파티를 마친 늦은 밤, 젊은 교수 과 그의 아내 허니를 집으로 초대한다. 술이 오가며 분위기는 가벼운 듯 보이지만, 조지마사는 손님 앞에서도 서로를 건드리는 말을 멈추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대화는 ‘게임’이 된다. 칭찬처럼 시작한 문장이 모욕으로 바뀌고, 가벼운 농담이 폭로로 이어진다. 허니도 그 싸움에 휘말리면서 자기들의 불안과 위선이 드러난다. 그리고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조지마사는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이야기’의 규칙을 깨뜨린다. 결국 거실에는 술병과 재, 뒤틀린 말들만 남고, 네 사람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맨정신에 가까워진다.

오늘 내가 찍고 싶은 컷은 새벽녘 거실이야. 술병이 굴러다니고 재떨이는 넘쳐 있고, 쿠션은 어긋나 있고,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지. 그 가운데 마사가 창 쪽에 앉아 가만히 숨을 고르는 순간을 거친 질감의 클로즈업으로 잡고 싶어. ‘감정을 과하게 밀지 않고도’ 얼굴과 공간만으로 충분히 전달되는 장면이거든. 번진 화장, 충혈, 입술의 건조함 같은 것들이 새벽빛 아래에서 숨지 못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말이야.


2. Scene Reading: 이 작품이 말하는 ‘두려움’은 무엇인가

제목부터가 도발적이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는 '아기돼지 삼 형제' 동화 속 노래 '누가 커다란 나쁜 늑대를 두려워하랴?'를 비틀어서 만든 말인데, 여기서 핵심은 ‘버지니아 울프그 이름이 불러오는 이미지야. 너무 예민하게 현실을 바라보는 감각, 말로 끝까지 밀어붙이는 정직함, 그리고 그 정직함이 가져오는 피로 같은 것들. 그러니까 이 제목은 이렇게 들릴 수도 있어. ‘누가 환상 없이 사는 걸 견딜 수 있나?’

 

조지마사는 서로를 망가뜨리는 것 같지만 동시에 서로에게 기대고 있어. 둘이 공유해 온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야. 중요한 건 그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보다, 그 이야기가 둘에게 어떤 역할을 해왔는가야. 버티게 해 주고, 체면을 만들어주고, 실패를 덮어주고, ‘우리 아직 괜찮다’는 착각을 유지하게 해주는 장치였던 거지.

 

그런데 새벽이 오면, 조명도 바뀌고 공기도 바뀌고, 더 이상 그 장치가 예전처럼 작동하지 않아. 이 작품의 미장센은 결국 밤(유예)에서 새벽(확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봐도 돼.


새벽의 폭로 : 새벽빛이 창가에 앉은 여성의 지친 얼굴을 차갑게 가르며 번진 화장과 주름, 공허한 표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거친 클로즈업 장면.


3. Director’s Cut: 취한 밤에서, 깨어나는 새벽으로

연출의 방향은 ‘감정 과잉’이 아니라 ‘상태 변화’에 두고싶어. 초반엔 모두가 술기운을 빌려 말을 하고, 후반엔 술기운이 빠지면서 말이 무게를 가져. 그래서 화면도 그 흐름을 따라가야 해. 밤에는 흔들리고, 새벽에는 고정되는 거지. 흔들림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더 숨길 수 없는 표정과 어지럽혀진 공간의 사실감이거든.

🎥 Camera Work: 핸드헬드의 열기, 스태틱의 냉정함

- 밤의 핸드헬드: 초반의 거실은 ‘파티의 연장’처럼 보여야 해. 그래서 카메라는 인물들이 서로 끼어들고, 말이 겹치고, 웃음이 비웃음으로 바뀌는 순간마다 핸드헬드로 약간의 불안정함을 남길 거야. 단, 인물의 호흡과 동선에만 붙어서 최소한으로 흔들리게 만들 거야.

- 대화의 거리: 조지마사의 싸움은 가까이서 보면 ‘연기’처럼 보일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일부러 투샷와이드를 섞어서, ‘둘이 한 공간을 어떻게 점령하는지’를 보여주고 싶어. 소리를 지르는데도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는 순간이 있어. 반대로 작은 말인데도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는 순간도 있고. 그 차이를 거리와 프레이밍으로 정리해 줄 거야.

- 새벽의 스태틱: 후반부로 갈수록 카메라를 정리할 거야. 특히 결정적인 ‘환상의 규칙이 무너지는’ 이후에는 삼각대 고정으로 바꾸고, 인물들을 화면 안에 오래 두고 싶어. 카메라가 더 이상의 개입을 멈추는 시간. 그 시간이 이 장면에 꼭 필요하거든.

- 클로즈업의 사용: 감정 폭발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클로즈업을 많이 쓰잖아? 난 그러지 않을 거야. 다만, 새벽에 가까워졌을 때, 말이 줄고 표정이 남는 구간에서만 얼굴을 가까이 당길 거야. 번진 화장이나 붉어진 눈 같은 디테일이 ‘결과’로 보이게 만드는 타이밍이 중요해.

💡 Lighting: 따뜻한 실내광에서, 새벽의 하드 라이트로

- 밤의 실용 조명: 초반은 스탠드, 벽등, 테이블 램프 같은 실용 조명 중심으로 갈 거야. 따뜻한 텅스텐 톤이지만 아늑하진 않게. 조명이 여러 개면 그림자도 여러 겹이 생기잖아. 그 ‘겹친 그림자’가 이 거실의 분위기랑 잘 맞아. 겉으론 파티인데, 속은 계속 불편한 상태니까.

- 새벽의 하드 라이트: 핵심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야. 이 빛은 ‘미화’가 아니라 ‘폭로’로 써야 해. 확산을 줄이고, 가능한 한 날카로운 경계를 만들 거야. 얼굴에 생기는 그림자가 또렷해야 하고, 거실 바닥의 어지러움도 숨지 않아야 해. 새벽빛이 들어오는 각도가 바뀌면서, 그동안 조명이 가려주던 것들이 순서대로 드러나는 느낌이면 좋겠어.

- 색온도 싸움: 밤의 따뜻한 조명새벽의 차가운 자연광잠깐 겹치는 구간을 만들 거야. 그때 인물의 얼굴이 한쪽은 따뜻하고 한쪽은 차갑게 갈라지지. 이건 과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새벽에 집에서 흔히 생기는 상황이잖아. 나는 그 자연스러운 ‘불편함’을 그대로 활용할 거야.

🔊 Sound: 소음이 가득한 밤, 그리고 새벽의 ‘작은 소리’

- 밤의 소리: 초반은 거실이 꽉 찬 소리로 가야 해. 잔 부딪히는 소리, 얼음이 구르는 소리, 신경질적인 웃음, 겹치는 대사. 단, 이 소음이 ‘시끄럽기만’ 하면 피곤해지니까, 중요한 순간에는 소리를 정리해 줄 거야. 누가 상대의 약점을 정확히 찌르는 순간, 주변 소음이 살짝 내려가서 그 문장만 또렷해지는 식으로.

- 정적의 설계: 결정적인 순간 이후에는 소음을 빼고 룸 톤을 남길 거야. 냉장고 모터 소리, 멀리 지나가는 차 소리, 유리잔이 테이블에 닿는 작은 마찰음 같은 것들. 이 소리들은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 새벽의 바깥소리: 새벽에는 실내가 조용해지는 대신 바깥이 들려. 아주 멀리서 들리는 새 소리나 바람 소리 같은, 평범한 소리들. 그 평범함이 오히려 잔인하게 대비돼. 거실 안은 폐허인데, 밖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하루를 시작하니까. 나는 그 대비를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려주고 싶어.


밤의 전쟁터 : 새벽 3시 어지러운 거실에서 술병과 연기 속에 두 사람이 기울어진 화면 구도로 격렬히 다투는 혼란과 긴장이 폭발한 와이드 장면.


4. Editor’s Note: 환상이 사라진 뒤에도, 관계는 남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이 끝나갈 때, 마사는 한 문장을 남겨. ‘나… 두려워.’ 그 말이 꼭 거창한 철학처럼 들리지 않아서 더 아프더라. 환상이 무너진 자리에 남는 건 의외로 단순해. 나를 버티게 해주던 말이 사라졌을 때, 나는 무엇을 붙잡고 있나. 이 질문이야.

 

조지마사는 서로를 망가뜨리면서도, 동시에 서로의 약한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알아. 그래서 이 작품은 ‘사랑이냐 증오냐’ 같은 단순한 구도로 정리되지 않아. 오히려 함께 살아온 시간이 만들어낸 습관과 공모를 보여주지. 그리고 새벽빛은 그 공모를 덮어주지 않아. 그냥 밝게 비춰. 그래서 관객은 눈을 돌리고 싶어도, 쉽게 못 돌리지.

 

나는 이 작품이 남기는 결론이 ‘환상은 나쁘다’가 아니라는 게 좋더라. 어떤 환상은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만, 어떤 환상은 사람을 살게도 하니까.

 

[Scene Keyword]

Edward Albee,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Illusion, Dawn Light, Hard Light, Practical Lighting, Handheld to Static, Room Tone, Marriage Drama, Psychological Tension

 

 

 

작품 : Edward Albee,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 (희곡)
※ 본 글은 장면 해석·비평 목적의 오리지널 콘텐츠이며, 작품 속 갈등을 모방하거나 과도한 음주를 권장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