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너는 지금, 어디까지 잠겨 있는 기분이야?
지금의 나는 직장생활을 해. 그래서 시키는 것만 잘하다가 퇴근하면 되는 일상을 보내고 있지.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 프리랜서로 영상편집을 할 땐 모든 계획과 할 것을 내 주관으로 해야만 했거든. 그렇게 방 안에서 일을 하거나 혹은 멍하니 있다 보면, 그런 느낌 들 때가 있어. 하루가 끝나갈수록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느낌? 할 일은 늘어나고, 책임은 쌓이고, 난 그대로인데 마음은 답답해지는 거지. 하지만 그럴 때도 이렇게 이겨 냈어. ‘괜찮아.’ ‘별일 없어.’ 표정도 적당히 맞추고, 루틴도 끝까지 굴려보려고 했거든.
사무엘 베케트의 『행복한 날들(Happy Days)』은 그 상태를 무대 위에 아주 단순한 그림으로 올려놓은 작품인 것 같아. 주인공 위니는 1막에서 허리까지, 2막에선 목까지 흙더미에 묻혀 있어. 도망도, 방향 전환도, 몸짓도 거의 못 해. 그런데도 위니는 하루를 ‘정리’하듯 시작해. 가방에서 칫솔을 꺼내고, 거울을 확인하고, 양산을 펴고, 말을 이어가. ‘오늘도 좋은 날이겠지.’ 같은 문장을, 스스로에게 들려주듯이.
오늘 내가 담아보고자 하는 장면은 ‘피할 수 없는 밝음’이야. 이 작품은 어둡게 찍으면 오히려 도망갈 구멍이 생겨. 그래서 나는 그림자 숨김 없이, 밝게 갈 거야. 하이 키 조명으로 피부의 건조함, 흙의 갈라짐, 입술의 미세한 떨림까지 다 보이게. 밝아서 편안한 게 아니라, 밝아서 더 숨 막히는 화면을 만들고 싶어.
[시놉시스 | 묻혀가면서도 말을 놓지 않는 사람]
황량한 벌판 한가운데, 위니는 흙더미에 허리까지 묻힌 채 깨어난다. 벨 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위니는 검은 가방 속 물건들을 꺼내며 자기만의 순서를 이어간다. 남편 윌리는 뒤편 구멍 어딘가에 있고, 가끔 신문을 뒤적이거나 짧게 반응할 뿐 위니의 말에 거의 호응하지 않는다.
2막이 되면 위니는 목까지 묻혀 얼굴만 남는다. 손도 쓸 수 없고, ‘일상’이라 부를 만한 행동도 제한되지만, 위니는 여전히 말을 이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붙잡는다. 이 작품은 몸이 멈출수록 말이 더 절박해지는 상태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오늘 내가 찍고 싶은 컷은 2막의 롱 샷(Long Shot)이야. 화면 대부분이 메마른 황무지로 채워지고, 중앙엔 위니의 얼굴만 작은 점처럼 남아 있는 구도. 아지랑이(Heat Haze) 때문에 먼 지평선이 흔들리는데, 그 가운데서 위니가 ‘밝은 표정’을 억지로 유지하는 순간을 잡고 싶어. 웃음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 웃음이 무너지지 않으려는 힘처럼 보이게.
2. Scene Reading: ‘루틴’이 무너질 때, 현실이 들이닥친다
위니가 반복하는 행동은 ‘귀여운 습관’이 아니야. 현실을 정면으로 보지 않기 위한 기술에 가까워. 물건을 꺼내고, 닦고, 확인하고, 다시 넣는 순서가 유지되는 동안엔 ‘내가 아직 하루를 운영하고 있다’는 착각이 가능하거든. 말도 마찬가지야. 말이 끊기면, 그다음은 침묵이 아니라 ‘상황’이 와. 내가 묻혀 있다는 사실, 시간이 위로 차오른다는 사실, 도움을 청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사실이.
그래서 이 작품에서 태양의 역할은 무조건적인 노출이야. 그늘이 없다는 건 쉬는 곳이 없다는 뜻이고, 가릴 수 없다는 건 꾸밀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위니가 양산을 펴는 장면이 의미 있는 이유는, 잠깐이라도 가릴 수 있길 바라지만, 이 세계는 그걸 오래 허용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 짧은 시도 자체가, 위니의 방식인 거야.

3. Director’s Cut: 움직임을 줄이고, ‘시간’이 보이게 한다
이 작품을 영상으로 옮길 때 핵심은 ‘부동(Immobility)’이야. 위니가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보는이들에게 몸으로 느끼게 하려면, 카메라도 괜히 과하게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아. 대신 프레임과 빛, 그리고 소리의 반복으로 ‘시간이 지나간다’를 만들 거야.
🎥 Camera Work: 고정 프레임과 ‘느린 압축’
- 고정(Static): 기본은 삼각대 고정이야. 위니가 말을 이어도, 카메라는 끝까지 고정된 시선으로 남을 거야. 가까이 달려가 위로하는 대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관찰로 가는 거야. 그게 이 작품의 외로움을 더 정확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
- 느린 압축(Slow Push / Slow Zoom): 1막에서 2막으로 넘어갈수록 프레임을 아주 조금씩 조일 거야. 2막에선 위니의 얼굴 주변 여백이 확 줄어든 구도로 시작해서, 대사와 함께 조금씩 더 가까워지게. 흙이 위니를 조이는 것과, 화면이 위니를 조이는 것이 같은 속도로 가면 관객은 더 쉽게 ‘답답함’을 체감해.
- 렌즈 선택: 초반은 35mm~50mm로 현실적인 거리감을 두고, 2막 클로즈업은 85mm 이상으로 ‘거리’를 유지한 채 당겨와. 가까이 들이대는 클로즈업이 아니라, 멀리서도 도망칠 수 없게 만드는 클로즈업이 되게.
💡 Lighting: 하이 키지만, 부드럽지 않게
- 탑 라이트(Top Light): 정오 태양처럼 위에서 내리꽂히는 빛을 기본으로 둬. 얼굴에 그늘이 거의 없게 만들면, 표정이 ‘예쁘게’ 정리되지 않아. 대신 주름, 건조함, 눈가의 피로가 그대로 남아.
- 하이 키(High Key): 배경 하늘은 과감하게 밝게 날려. 대신 위니 얼굴은 날아가지 않게 노출을 정확히 잡아서, 배경은 하얗게, 얼굴은 또렷하게 분리해. ‘숨을 곳 없는 밝음’이 화면 구조로 보이게 하는 거야.
- 흙의 표면: 흙더미는 단색으로 죽이면 안 돼. 탑 라이트 아래에서 갈라진 결, 모래 알갱이, 작은 돌이 보이게 콘트라스트를 유지해. 위니가 ‘묻힌다’는 사실이 추상이 아니라 텍스처로 납득돼야 하니까.
🔊 Sound: 벨, 바람, 그리고 마른 재질
- 벨(Bell): 하루의 시작과 끝을 자르는 소리니까, 예쁜 알람이 아니라 딱딱하고 짧은 금속음으로 둔다. 소리가 울릴 때마다 관객이 ‘또 시작이구나’ 하고 몸을 굳히게 만들고 싶어.
- 건조한 소리: 양산을 펼 때 ‘바스락’, 가방을 뒤질 때 ‘사각’, 입술이 마를 때 나는 작은 숨소리까지 잡아. 물이 없는 세계는 소리도 메말라. 그 마른 재질감이 쌓이면, 화면보다 먼저 몸이 답답해져.
- 원거리의 적막: 음악은 쓰지 않고, 멀리서 얇게 깔리는 바람만 둘 거야. 바람이 커지면 위니의 말이 밀린다는 느낌이 들 수 있게 밸런스를 조절해. ‘말로 버틴다’는 설정이 소리에서도 성립해야 하니까.

4. Editor’s Note: ‘좋은 날’이라고 말하는 기술
위니를 보면서 처음엔 이렇게 생각하기 쉬울 것 같아. ‘저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근데 조금만 더 보면, 그 말밖에 남지 않아서라는 게 느껴져. 행동이 줄어들수록 말이 늘고, 말이 늘수록 ‘살아 있음’을 붙잡게 되거든.
나도 비슷한 것 같아. 하루가 무겁고, 자리가 답답할수록 이상하게 루틴을 더 지키거든. 커피를 내리고, 방 안에서 운동을 하고, 그리고 농담을 한 번 던지고. 그게 다 거창한 의지라기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손잡이일 때가 많아. 『행복한 날들』은 그 손잡이가 얼마나 작고, 동시에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주는 작품인 것 같아.
[Scene Keyword]
Samuel Beckett, Happy Days, Theatre of the Absurd, High Key Lighting, Hard Light, Static Camera, Slow Zoom, Immobility, Desert Stage, Existential Drama
작품 : Samuel Beckett, Happy Days (희곡)
※ 본 글은 장면 해석·비평 및 연출 연구 목적의 오리지널 콘텐츠이며, 위험 행동을 권장하거나 모방을 유도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