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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47] 야스미나 레자 『아트』 : 하얀 캔버스의 텍스처와 관계를 해부하는 플랫 라이팅

by 필름회색소음 2026. 1. 10.

1. 프롤로그: 같은 흰색을 보고도, 왜 우리는 다르게 말할까

가끔 촬영하는 분들 보다보면, 흰색 종이 앞에서 카메라를 조작하는 장면 본 적 있어? 바로 화이트밸런스를 맞추는 거거든. 이유는 간단하지만 매우 중요해. 흰색을 같은 흰색으로 보이게 하려고 하는 거지. 찍는 환경이나 조도에 따라 카메라에 담기는 색상의 밸런스가 다 다르거든. 그걸 흰색으로부터 최대한 통일시켜야 나중에 색상편집할 때 수월해지거든.

그런데 진짜... 촬영 편집을 하다보면, 힘들게 수치가 맞춰도 어떤 컷은 좀 더 차갑고 어떤 컷은 좀 더 누렇게 뜨는 경우가 늘 있어. 참... 힘들게 하지. 색만 그럴까? 색은 맞는데 정서가 어긋난 상태. 사람 관계도 딱 그럴 때가 있잖아? 같은 일을 겪고, 같은 말을 들었는데, 누군가는 ‘별일 아니야’ 하고, 누군가는 ‘무시당했어’라고 느끼는 순간 말이야.

 

야스미나 레자의 『아트』는 그 어긋남이 한 장의 그림 때문에 폭발하는 이야기야. 세르주가 거금을 들여 산 건 ‘하얀 바탕에 아주 희미한 선이 있는 하얀 그림’이고, 마크는 그걸 보자마자 웃어버리지. 문제는 그 웃음이 그림을 향한 게 아니라, 친구를 향한 판정으로 들린다는 거야. 이반은 둘 사이에서 평화를 지키려 하지만, 그 중재가 오히려 불을 키우기도 하고.

 

오늘 내가 담아보고 싶은 건 ‘그림’보다 그림 앞에서 변하는 태도야. 멀리서 보면 그냥 흰색인데, 가까이 가면 캔버스 올이 보이고, 미세한 붓자국이 보이고, 반사광 때문에 어떤 각도에선 아무것도 안 보이기도 하는 그림인데, 우정도 그래. ‘친하니까 괜찮지’라고 넘긴 것들이, 각도 하나 바뀌면 갑자기 다 드러나.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드라마틱한 조명으로 만들기보다, 그림자 없는 갤러리 빛으로 차갑게 펼쳐놓고 싶어. 숨길 곳이 줄어들수록, 말의 칼끝이 더 선명해지니까.

[시놉시스 | 하얀 그림 한 장이 드러낸 15년 우정의 틈]
피부과 의사 세르주는 유명 작가 ‘앙트리오’의 작품을 구입한다. 작품은 하얀 캔버스 위에 아주 희미한 선과 결이 있는 형태다. 오랜 친구 마크는 이 구매를 이해하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또 다른 친구 이반은 둘의 충돌을 막으려 하지만, 말이 엇갈릴수록 세 사람의 불만과 서열 의식, 질투와 기대가 한꺼번에 튀어나온다.

그림을 둘러싼 논쟁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어떤 사람으로 규정해왔는가’로 이동한다. 결국 하얀 캔버스는 친구들을 갈라놓는 벽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각자가 숨겨온 감정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오늘 내가 찍고 싶은 컷은 세 사람이 그림 앞에 모여 서는 풀 샷이야. 벽에는 ‘하얀 그림’이 걸려 있고, 거실은 정갈한데 공기는 싸늘해. 누가 한 발 앞으로 나가면 누가 한 발 뒤로 물러나고, 누가 웃으면 누군가의 눈이 굳어버리는 순간. 플랫 라이팅으로 그들의 얼굴에 생기는 ‘그럴듯한 그림자’를 없애고, 대신 거리와 시선만 남겨서 포착하고 싶어.


2. Scene Reading: ‘취향’이 아니라 ‘서열’의 싸움

이 작품이 웃긴 이유는 대사가 '재치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정확해서'야. 셋은 그림을 두고 말싸움을 하는데, 실제로는 서로의 자리를 확인하고 있어. 마크는 ‘내가 믿는 기준’이 흔들리는 게 불편하고, 세르주는 ‘내 선택을 네가 함부로 깎아내리면 안 된다’고 버티지. 이반은 두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양쪽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결국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자리에 서게 되고.

 

그래서 하얀 그림은 ‘백지’가 아니야.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관객의 판단과 인물의 자존심이 더 크게 튀어나와. 이 작품의 핵심은 ‘예술 감상법’이 아니라, 친구를 이해한다는 말 뒤에 숨어 있던 통제 욕망이야. 누구나 친구가 ‘변하길’ 바라면서도, ‘내가 허락한 만큼만’ 변하길 바랄 때가 있거든.


2억 원의 텍스처 : 측면 빛에 의해 두터운 흰색 임파스토 붓질의 질감과 캔버스 결, 그리고 거의 보이지 않는 흰 대각선 선들이 드러나는 미니멀한 추상 매크로 장면.


3. Director’s Cut: 갤러리처럼 밝게, 수술대처럼 차갑게

연출의 방향은 명확해. 감정을 부풀리는 빛이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는 빛이 필요해. 그래서 공간을 ‘드라마의 거실’이 아니라 ‘전시 공간’처럼 만들 거야. 밝고 깨끗한데, 편하진 않은 곳.

🎥 Camera Work: 정면의 거리, 그리고 캔버스의 증거

1) 정적인 프레이밍: 기본은 삼각대 고정이야. 대화가 날카로워질수록 카메라까지 흔들리면 감정이 과해져. 대신 인물들이 프레임 안에서 서로 밀고 당기게 두고, 그 움직임을 ‘증거’처럼 기록할 거야.

2) 거리의 설계: 투 샷을 잡을 때 둘 사이에 ‘그림’을 끼워 넣어. 같은 편인지 아닌지를 그림이 가르는 것처럼. 그리고 세 사람 샷에서는 이반을 미세하게 뒤로 빼서, 늘 한 박자 늦게 반응하는 위치에 두면 좋아. 중재자의 외로움이 구도에서 먼저 보이거든.

3) 매크로는 ‘설득’이 아니라 ‘증명’: 캔버스를 클로즈업으로 들어가되, 멋있게 포장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캔버스 올, 물감층의 두께, 미세한 광택 차이를 차분하게 보여줘. ‘정말 아무것도 없냐’는 질문에 화면이 조용히 대답하게 만드는 거지.

💡 Lighting: 플랫 라이팅, 흰색의 함정, 그리고 반사 제어

1) 플랫 라이팅(Flat Lighting): 갤러리처럼 확산광을 넓게 깔아 그림자량을 줄일 거야. 얼굴 옆에 예쁜 그림자가 생기면 ‘드라마’가 되는데, 이 작품은 그게 아니라 ‘말싸움의 기록’이 되어야 하거든.

2) 화이트의 미묘한 차이: 세르주의 집은 쿨 화이트로 잡아. 따뜻한 가정 느낌을 빼고, 정리된 취향의 공간처럼. 대신 너무 파랗게 밀면 인물이 죽어 보여서, 피부가 떠보이지 않는 선에서만 차갑게 가져갈 거야.

3) 반사광을 통제: 하얀 그림은 각도에 따라 번쩍거려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순간’이 생겨. 그게 오히려 포인트야. 같은 그림을 두고도, 누군가는 ‘보인다’고 하고 누군가는 ‘안 보인다’고 하니까. 그래서 조명 각도를 조금씩 바꿔가며, 관객이 ‘아, 진짜로 보이다가 안 보이네’라고 체감하게 만들 거야.

🔊 Sound: 웃음의 건조함, 방의 소리, 그리고 선이 그어지는 마찰음

1) 웃음은 가깝고 건조하게: 마크의 비웃음은 공간에 퍼지게 두면 가벼워져. 그래서 마이크는 가까이, 리버브는 최소로. 웃음이 ‘장난’이 아니라 ‘칼끝’처럼 들리게 만들 거야.

2) 룸 톤(Room Tone): 음악으로 분위기 만들지 않아도 돼. 대신 거실의 공기 소리, 멀리서 들리는 냉장고 모터 소리, 컵 내려놓는 소리 같은 현실적인 소리들을 또렷하게 두면, 침묵이 더 팽팽해져.

3) 매직펜 마찰음: 클라이맥스에서 선을 그을 때의 ‘뿌드득’ 소리를 크게 잡을 거야. 돈이 날아간다는 과장보다, ‘선 하나가 관계의 경계를 만들어버리는’ 그 순간의 손맛이 들리게.


하얀 그림 앞의 세 남자 : 차가운 백색 조명 아래 미니멀한 파리 아파트 거실에서, 거대한 흰 캔버스를 마주한 세 남자가 각자의 태도로 작품을 바라보며 지적인 긴장이 흐르는 와이드 장면.


4. Editor’s Note: 우리는 친구를 보나, 친구 위에 얹힌 기대를 보나

결국 셋은 그림 때문에 무너진 게 아니야. 각자가 친구에게 걸어둔 오래된 기대가 들통났기 때문에 무너진 거지. 세르주는 ‘나도 인정받고 싶다’고 말하고, 마크는 ‘너는 내 기준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말하고, 이반은 ‘제발 싸우지 말고 나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고 말해. 다 자기 얘기야. 그림은 그냥 계기였고.

 

하얀 캔버스가 재밌는 건, 그 위에 ‘정답’이 없어서야. 보는 사람이 자기 마음을 올려놓게 되거든. 이 포스팅을 쓰고나니 괜히 오래된 친구 생각이 나. 전화하면 어색할까 봐 망설이다가, 그래도 한 번은 안부 묻고 싶어지는...? 

 

[Scene Keyword]

Yasmina Reza, Art, White Painting, Texture, Flat Lighting, Friendship, Minimalism, Gallery Look, Macro, Modern Comedy

 

 

 

작품 : Yasmina Reza, Art (희곡)
※ 본 글은 장면 해석·비평 목적의 오리지널 콘텐츠이며, 원문 인용은 최소화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