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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48] 베르나르 베르베르 『심판』 : 무한한 백색 호리존과 선택의 무게를 드러내는 소프트 블룸

by 필름회색소음 2026. 1. 10.

1. 프롤로그: 인생의 로그파일을 검사받는 시간

혹시 그거 알아? 단 1초 2초의 결과물을 위해 짧게는 몇 십분, 길게는 시간단위로도 작업하는 게 영상작업이야. 그래서 가끔 영상 편집을 끝내고 렌더링을 걸다 보면 이런 상상을 하곤 해. ‘결과물뿐만 아니라, 누군가 내 타임라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프레임 단위로 본다면 어떨까?’ 하고 말이야. 너무 자연스러워서 몰랐지만 엄청난 노력의 흔적들을 볼 수 있을 것이고, 혹은 어디서 컷을 숨겼는지, 실수를 덮었는지, 또 일부러 흐리게 처리했는지까지 전부 볼 수 있는 거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인생이 그 정도로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면, 죽은 뒤의 그 사람의 타임라인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희곡 『심판』은 그 장면을 아주 직접적으로 펼쳐 놓는 작품같아. 주인공 아나톨은 눈을 뜨자마자 ‘사후 법정’에 앉아 있고, 판사와 검사, 변호사가 그의 삶을 정리해 나가는 이야기거든. 여기서 묻는 건 ‘착했냐 나빴냐’보다 더 구체적인 것 같아. 너는 네 가능성을 써봤니? 사랑 앞에서 도망치진 않았니? 그렇게 질문의 방향이 조금 다르지.

 

오늘 내가 담고 싶은 건 경계가 사라진 공간이야. 벽과 바닥의 선이 지워진 백색 호리존처럼, 어디까지가 공간이고 어디부터가 공기인지 구분이 안 되는 곳. 그 안에 사람과 저울만 남겨두면, 변명할 소품이 사라져. 그래서 조명은 과장된 ‘천국 느낌’이 아니라, 너무 밝아서 숨기기 힘든 밝음으로 가고 싶어. 하이라이트가 살짝 번지는 소프트 블룸은 그 ‘밝음의 압력’을 부드럽게 보이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더 낯설게 만들어주니까.

[시놉시스 | 다시 태어날 것인가, 여기서 멈출 것인가]
폐암으로 사망한 판사 아나톨 피숑은 사후 세계의 법정에서 눈을 뜬다. 그곳에는 검사 베르트랑, 변호사이자 수호천사인 가브리엘, 재판장 카롤린이 있다.

그들은 아나톨의 삶을 두고 ‘판정’을 내리려 한다. 쟁점은 단순히 선행의 숫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재능과 욕망을 외면하지 않았는지, 관계에서 회피하지 않았는지, 선택의 순간마다 어떤 방향으로 걸었는지를 따져 묻는다. 아나톨은 그 질문들 앞에서, 스스로도 미뤄두었던 장면들을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오늘 내가 찍고 싶은 컷은 판결 직전의 풀 샷이야. 사방이 하얀 호리존 공간. 중앙엔 천칭 저울이 있고, 인물들은 저울을 사이에 둔 채 서로 다른 방향에서 아나톨을 바라봐. 그림자는 거의 지워지고, 하이라이트는 소프트하게 번져. 현실의 법정처럼 답이 정해진 분위기가 아니라,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공기가 화면에 남도록 만들고 싶어.


2. Scene Reading: 죄는 ‘나쁜 짓’만이 아니라 ‘미뤄둔 선택’이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죄’의 정의야. 누굴 때렸냐, 훔쳤냐 같은 사건만 따지는 게 아니라, 두려워서 끝내 하지 않은 것을 묻거든. 아나톨은 겉으로는 성실한 직업인이고, 사회적으로도 큰 흠이 없어 보이는데, 사후 법정은 다른 질문을 던져. ‘왜 그때 멈췄지?’ ‘왜 선택을 남에게 넘겼지?’ ‘왜 한 번 더 말해보지 않았지?’

 

그래서 이 법정은 무섭기보단 투명해야 해. 감정의 연기가 끼면, 이 질문이 흐려져 버리니까. 하얀 공간은 ‘깨끗함’이라기보다, 덜어낸 상태야. 남은 것만 보게 하는 세팅. 이 작품이 법정 드라마를 빌려온 이유도 결국 거기 있어. 내 삶을 누가 재판한다기보다, 내가 내 삶을 정리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


카르마의 무게 : 밝은 백색 공간에서 금빛 저울 한쪽에 기억이 담긴 유리병과 삶의 기록을 상징하는 서류 더미가 놓여, 부드러운 역광 속에 흔들리는 심판의 순간을 그린 클로즈업 장면.


3. Director’s Cut: 그림자 없는 빛, 경계 없는 벽

연출의 핵심은 ‘천국처럼 예쁜 화면’이 아니라, 현실에서 한 발 떠 있는 물리감이야. 너무 환상적으로 가면 가벼워지고, 너무 사실적으로 가면 그냥 흰 스튜디오가 되니까. 그래서 나는 ‘조금 이상한데, 정확히 뭔지 말은 못 하겠다’는 선에서 만들 거야.

🎥 Camera Work: 공간을 가늠할 수 없게, 시선을 붙들어두기

- 호리존의 무한감: 바닥과 벽의 경계가 보이면 ‘세트’처럼 보일 수 있어. 그래서 호리존 곡면을 최대한 살리고, 프레임 안에서 모서리를 지워. 관객이 거리감을 계산하지 못하게 만들면, 인물의 말이 더 크게 들려.

- 부드러운 이동: 카메라는 짐벌이나 스테디캠으로 아주 느린 이동을 쓰되, ‘움직인다’는 인상보다 ‘조금씩 위치가 달라진다’ 정도로만. 이 공간의 규칙이 다르다는 걸 시각으로 암시하는 거지.

- 저울 중심의 구도: 인물을 찍을 때도 저울을 프레임에 걸어둬. 대화가 감정싸움으로 보이는 순간을 막고, ‘판정의 장’이라는 구조를 계속 기억시키는 장치가 되거든.

💡 Lighting: 하이 키, 소프트 블룸, 그리고 과한 청결의 불편함

- 그림자 최소화: 확산광을 크게 써서 발밑 그림자를 거의 없애. 그림자가 사라지면 사람은 바닥에 ‘붙어’ 있지 않고, 약간 떠 있는 느낌이 나.

- 소프트 블룸의 용도: 뽀샤시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 하이라이트가 번질 때 생기는 경계의 흐림을 쓰는 거야. 특히 저울의 금속, 흰 의상, 얼굴의 하이라이트가 살짝 번지면 ‘이 공간은 또렷한 현실이 아니다’라는 인상이 생겨.

- 색은 최대한 빼기: 하얀 공간이 누렇게 뜨거나 파랗게 뜨면 감정이 실려. 그래서 컬러는 최대한 중립으로 두고, 대신 밝기와 반사로만 분위기를 만들 거야.

🔊 Sound: 소리가 울리지 않는 넓은 방, 저울만 남기는 잔향

- 데드 룸 처리: 공간은 무한히 넓어 보이는데, 소리는 울리지 않게 갈 거야.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면, 여긴 ‘전시된 법정’이 아니라 ‘검사실’처럼 느껴지거든.

- 저울 소리만 예외: 저울이 미세하게 움직일 때 나는 금속 소리, 접시가 맞물리는 소리만 잔향을 줘. 관객이 ‘지금 무게가 재였다’는 걸 귀로 먼저 알아차리게 만드는 거지.


천상의 법정 : 끝없는 백색 공간의 사후 법정에서 빛나는 거대한 저울 아래, 검사와 피고, 변호인, 판사가 격렬하게 맞서는 인간적 갈등이 펼쳐지는 초현실적 장면.


4. Editor’s Note: 다음 장면을 선택하는 건 결국, 나다

심판』이 남기는 여운은 의외로 간단해. ‘착하게 살아라’가 아니라, 미뤄둔 장면을 언젠가 다시 보게 된다는 거야. 아나톨은 자기 삶을 들여다보다가 깨닫지. 사건이 아니라, 선택이 쌓여 인생이 된다는 걸. 그래서 마지막에 무엇을 택하든, 그 선택은 ‘천사’가 대신해주지 않아. 결국 본인이 해야 해.

 

나는 이 작품이 좋았던 이유가, 사후 세계를 보여주면서도 결국 현재를 건드리기 때문이야. 오늘 하루가 마음에 안 들었다면, 그건 ‘끝났다’가 아니라 ‘편집 가능하다’에 가깝게 느끼게 해주는 거지. 내일은 다른 컷을 찍을 수도 있으니까.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해. 내가 찍지 않은 장면은, 누구도 대신 넣어주지 않는다는 거...!


[Scene Keyword]

Bernard Werber, Le Jugement, Afterlife Courtroom, Cyclorama, Infinity White, Soft Bloom, High Key Lighting, Scale, Choice, Reincarnation

 

작품 : Bernard Werber, Le Jugement (희곡)
※ 본 글은 장면 해석·비평 목적의 오리지널 콘텐츠이며, 원문 인용은 최소화했습니다.
※ 본 글은 사후 세계를 소재로 한 희곡의 장면 분석이며, 특정 종교적 교리를 단정하거나 강요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