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사랑이 끝난 자리에 남는 건, 감정이 아니라 체면일 때가 있어
난 학창 시절부터 사실 댄서가 꿈이었어. 하지만 꾸던 꿈들을 점점 버리게 된 이유는 바로 사회와 어른들로부터의 배신감이 컸던 것 같아. 그저 무대가 좋아서 댄서가 되고 싶었던 한 젊은이를, 사회가 배출한 어른이라는 분들이 가만히 두질 않더라고. 그렇게 매 번 배신을 경험할 때 점점 먼저 무너지는 건 감정보다는 내가 나를 어떻게 믿어왔는지인 것 같아.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라는 생각도 계속 떠나질 않고, 그다음엔 ‘결국 내가 문젠가’로 바뀌지. 슬픔이 아니라, 모욕감이 오래 남는 이유가 거기 있었나봐.
똑같은 예시는 아니지만,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는 그 모욕감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아주 냉정하게 끝까지 보여주는 비극인 것 같아. 메데이아는 사랑 때문에 삶의 기반을 통째로 옮겼고, 이아손은 그 사랑을 ‘필요할 때만 쓰는 선택’으로 취급해. 여기서 중요한 건 선악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엄이 어떤 방식으로 무너졌는가야. 무너진 자리에서 메데이아는 ‘참는 사람’으로 남지 않지.
오늘 내가 카메라에 담고 싶은 건 빛의 역설이야. 메데이아의 혈통은 태양신 헬리오스로 연결되지. 그래서 나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의 끝에서 황금빛 역광(Golden Backlight)을 그녀 뒤에 두고 싶어. 도덕적으로는 무너졌는데 화면은 성스러워 보이는 순간. 그 불편한 대비가 『메데이아』의 온도라고 느껴.
[시놉시스 | 사랑의 대가가 ‘추방’으로 돌아온 밤]
콜키스의 공주 메데이아는 영웅 이아손을 돕기 위해 고향과 가족을 등지고 함께 도망친다. 두 사람은 코린토스에서 가정을 꾸리지만, 이아손은 권력과 안정을 위해 코린토스의 공주와 새 결혼을 추진하고 메데이아를 내쫓으려 한다.
메데이아는 겉으로는 물러나는 듯 보이지만, 선물이라는 형태로 독이 묻은 옷과 관을 보내어 왕실에 참극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아손에게 가장 깊은 절망을 남기기 위해, 되돌릴 수 없는 선택으로까지 나아간다. 마지막에 메데이아는 태양신이 보낸 전차를 타고, 무너진 도시 위를 떠나며 이아손을 아래에 남겨둔다.
오늘 내가 찍고 싶은 컷은 엔딩의 ‘거리감’이야. 지상은 혼란의 잔해로 어지럽고, 이아손은 아래에서 무너져 있는데, 메데이아는 전차 위에서 태양을 등진 채 실루엣으로 서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고, 대신 머리카락과 옷 가장자리만 금빛으로 타오르듯 윤곽이 잡히는 순간. ‘신성함’과 ‘파국’이 같은 프레임에서 서로를 부정하지 못하게 만들고 싶어.
2. Scene Reading: ‘황금’이 약속이 아니라 경고로 바뀌는 순간
『메데이아』에서 ‘황금’은 늘 반짝이는데, 기분이 좋아지진 않아. 황금 양털, 황금 관, 황금빛 혈통. 원래 황금은 성취의 색인데, 이 작품에선 대가를 요구하는 색인 거지. 눈에 띄는 만큼 빚을 남기고, 손에 쥐는 순간부터 이미 위험해지는 물성이지.
그리고 메데이아는 코린토스에서 끝까지 이방인이야. 그녀의 분노는 ‘감정이 격해서’가 아니라, 법과 언어가 아예 자기편이 아닌 세계에서 밀려나면서 만들어져. 이아손의 말은 논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계산이고, 메데이아의 말은 격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결론이야. 그래서 화면도 ‘문명적인 차가움’ 한쪽, ‘뜨거운 붉음’ 한쪽이 계속 싸우는 구도로 가야 해. 그게 이 작품의 구조랑 맞거든.

3. Director’s Cut: 아름답게 찍되, 미화하지 않는다
이 장면을 영상으로 옮길 때 내가 지키고 싶은 원칙은 하나야. 감정에 휘둘리는 카메라가 아니라, 결과를 보여주는 카메라. 메데이아를 ‘멋있게’ 만들려고 하면 작품의 질문이 흐려질 수 있어. 대신 화면은 아름답게, 상황은 차갑게. 이 거리감이 필요해.
🎥 Camera Work: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멀리서 확정한다
- 로우 앵글(Low Angle): 엔딩에서 메데이아는 ‘지상 위’에 있어. 카메라는 바닥에 가깝게 낮추고, 전차를 올려다보는 각도로 잡아. 이아손이 올려다보는 위치와 맞추면, 관객도 같은 높이에서 무력함을 느끼게 돼.
- 거리의 고정(Locked-off Wide): 절규가 커질수록 오히려 카메라는 멀어져야 해. 전차가 떠 있는 프레임을 고정 와이드로 오래 잡아서, ‘되돌릴 수 없음’을 화면 문법으로 확정해.
- 슬로우 모션은 최소: 불길이나 천의 움직임을 느리게 보여주고 싶다면, 딱 한 번만 써. 예를 들어 전차가 방향을 틀 때 옷자락이 뒤로 젖혀지는 순간 정도. 반복하면 ‘멋’으로 오해받기 쉬워서 조심해야 해.
💡 Lighting: 황금빛 후광과 딥 레드의 잔류
- 황금빛 역광(Golden Backlight): 메데이아 뒤에서 따뜻한 금색(약 2800K~3200K) 계열의 강한 역광을 쏴서, 얼굴은 어둠으로 남기고 윤곽만 빛나게 해. 플레어는 ‘막 퍼지게’가 아니라, 렌즈 각도와 플래그로 조절해서 후광처럼 얇게 남는 플레어로 만들 거야.
- 딥 레드 필(Deep Red Fill): 실루엣이 너무 검게만 떨어지면 화면이 단순해져. 그래서 아래쪽(지상)에는 아주 낮은 강도의 딥 레드를 깔아. 연기나 먼지 입자에 붉은 기운이 살짝 묻도록. ‘피’라고 직접 말하지 않아도, 관객이 색으로 느끼게 하는 방식이 더 정확해.
- 황금의 물성: 황금 관과 옷은 반짝임이 과하면 ‘예쁜 소품’이 돼. 하이라이트를 눌러서 무게감 있는 금속으로 보이게 만들고, 그 금속이 위험한 선물이었다는 걸 톤으로 남겨.
🔊 Sound: 불, 금속, 그리고 ‘높이’가 만든 거리
- 불의 소리: 불은 크게, 대신 과장된 효과음처럼 들리면 안 돼. ‘화르륵’보다 마른 재료가 타는 소리, 천이 축축하게 꺼지는 소리 같은 현실적인 레이어를 섞어.
- 금속의 소리: 관이 부딪히는 ‘딱’ 하는 금속음, 장신구가 흔들리는 작은 소리를 선명하게 잡아. 이 작품에서 황금은 축복이 아니라 경고니까, 금속음이 더 날카롭게 느껴져야 해.
- 목소리의 거리: 메데이아의 목소리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느낌으로 아주 얇은 잔향만 주고, 이아손은 잔향 없이 건조하게 둬. 같은 프레임에 있어도, 서로가 닿지 않는 거리가 소리로 들리게 만들고 싶어.

4. Editor’s Note: 불꽃의 결말은, 언제나 재만 남긴다
메데이아를 보고 있으면, ‘복수’가 승리처럼 보이는 순간이 잠깐 있어. 근데 그건 화면의 착시야. 실제로 남는 건 관계도, 미래도, 자기 자신도 같이 무너진 자리지. 그래서 나는 엔딩을 ‘통쾌함’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 오히려 황금빛을 더 강하게 줘서, 그 장면이 더 불편하게 오래 남게 만들고 싶어.
『메데이아』가 무섭게 다가오는 지점은 한 사람의 악행이 아니라, 존엄을 짓밟힌 사람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데 있어. 그래서 이 작품은 사랑 이야기이면서도, 결국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사고 보고서 같아.
[Scene Keyword]
Euripides, Medea, Golden Backlight, Deep Red, Silhouette, Greek Tragedy, Betrayal, Helios, Rim Light, Color Contrast
작품 : Euripides, Medea (희곡)
※ 본 글은 고전 비극의 장면 해석·비평 및 연출 연구 목적의 오리지널 콘텐츠이며, 작품 속 극단적 선택과 위해 행위를 조장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