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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52]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미스 줄리』 : 잠들지 않는 백야(Midnight Sun)와 ‘부엌’이라는 추락의 무대

by 필름회색소음 2026. 1. 12.

1. 프롤로그: 밤도 아니고 아침도 아닌 시간은 사람을 흔든다

밤을 새본 적 없는 사람은 없지? 난 요즘 지나칠 정도로 일찍 잠이 들지만, 예전 영상작업을 한참 할 땐 밤샘 작업이 일상이기도 했거든. 밤을 새우다 보면 밤공기와 새벽공기가 다르다는 걸 알 거야. 새벽 4-5시 전후쯤?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바뀌는 타이밍이 딱 그 시간대지. 요즘은 겨울이라 좀 더 이후쯤? 무튼 몸은 지쳐 있는데, 그 틈을 타서 평소엔 지켜지던 선이 조금 헐거워지기도 하는 시간이 바로 새벽인 것 같아.

 

스트린드베리의 『미스 줄리』는 그 ‘경계가 풀리는 시간’에 벌어지는 사고야. 하지 축제(Midsummer)의 밤, 바깥은 잠들지 않는 백야의 빛으로 계속 밝고, 저택의 지하 부엌은 열기와 냄새로 꽉 차 있어. 백작의 딸 줄리는 아래로 내려오고, 하인 은 위를 바라보지. 둘이 만나는 순간부터 이미 수직이 깨져. 그리고 새벽이 오면, 그 깨진 수직이 그대로 ‘대가’로 돌아와.

 

오늘 내가 담고 싶은 건 부엌의 공기야. 창문 너머는 차갑고 밝은데, 실내는 뜨겁고 탁하지. 이 온도 차를 조명과 소리로 계속 밀어붙이면, 줄리가 어떻게 ‘한 칸씩’ 내려가는지, 이 어떻게 ‘한 칸씩’ 올라서는지,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시놉시스 |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하지 축제의 밤, 백작이 집을 비운 사이 딸 줄리는 하인들의 흥겨움에 섞여 위험한 장난을 시작한다. 하인 줄리의 도발과 자신의 야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듯하다가, 결국 선을 넘게 만든다.

이후 권력의 무게가 바뀐다. 줄리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도망’을 말하지만, 은 계산적인 현실을 들이밀며 줄리를 압박한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축제의 음악은 멀어지고, 저택의 규칙은 다시 복구된다. 마지막에 줄리에게 면도칼을 건네며 ‘명예’라는 이름의 선택을 암시한다.

오늘 내가 찍고 싶은 컷은 끝이 가까운 새벽의 미디엄 샷이야. 부엌 창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빛이 줄리의 얼굴을 벗겨내듯 비추고, 식탁 위엔 면도칼이 놓여 있어. 드레스는 구겨져 있고, 말은 더 나오지 않는 순간. 새벽빛이 사람을 더 차갑게 보이게 만드는 이유를, 조명으로 증명해보고 싶어.


2. Scene Reading: 부엌은 ‘생활’의 공간이고, 그래서 더 잔인하다

미스 줄리』가 무서운 건, 비극이 궁전이 아니라 부엌에서 터진다는 점이야. 부엌은 저택에서 가장 낮은 자리이고, 노동의 냄새가 남는 곳이지. 줄리가 이곳에 ‘내려왔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지키던 위치가 흔들렸다는 표시야. 은 이 공간에서만큼은 줄리를 올려다보지 않아도 돼. 이미 지형이 달라졌거든.

 

소품도 정확해. 장화이 ‘밖’을 드나드는 사람이라는 표식이고, 줄리의 새장줄리가 ‘높은 곳’에 있지만 사실은 갇혀 있었다는 표식이지. 새가 죽는 장면은 과장을 할 필요가 없어. 부엌에서는 고기 손질하듯, 생활의 손놀림으로 일이 처리되거든. 그 무심함이 이 비극의 감정을 더 세게 때려.


출구 없는 면도칼 : 푸른 새벽빛이 비치는 나무 식탁 위에 은빛 면도칼이 차갑게 놓여 있고, 옆에는 흐릿한 황동 하인용 벨이 함께 보이며 끝을 예감하게 하는 매크로 장면.


3. Director’s Cut: 백야의 차가움과 부엌의 열기가 한 프레임에서 싸운다

연출의 중심은 ‘시간’이 아니라 온도야. 밖의 빛은 차갑고, 안의 공기는 뜨거워. 줄리의 관계도 똑같이 움직여. 처음엔 들뜨고 가까워지지만, 끝은 차갑게 굳어버리니까.

🎥 Camera Work: 좁은 프레임, 그리고 높이가 바뀌는 앵글

- 닫힌 프레임(Frame in Frame): 문틀, 선반, 창틀을 프레임 안에 걸어서 부엌이 ‘출구가 적은 공간’처럼 보이게 잡을 거야. 줄리가 불안해질수록, 화면은 더 좁은 구도로 들어가고, 인물 뒤에 벽이 가까이 붙어 보이게 만들 거야.

- 앵글의 교체: 초반 줄리살짝 로우 앵글로, 살짝 하이 앵글로 잡아. 관계가 뒤집히는 이후에는 반대로. 이걸 과시적으로 하지 않고 ‘조용히’ 바꾸면, 보는 이는 설명 없이도 권력의 이동을 느낄 거야.

- 식탁을 경계선으로: 식탁을 두 사람 사이에 두고 투 샷을 많이 써. 같은 공간인데, 서로 건너기 어려운 선이 하나 있는 것처럼. 면도칼은 그 선 위에 놓이는 오브제로 충분해.

💡 Lighting: 창밖 블루, 실내 앰버, 그리고 섞이지 않는 얼굴

- 바깥(백야)의 블루: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은 차가운 블루로 고정해. 밤이 지나도 계속 남아 있는 빛이라는 게 중요하니까. 이 빛은 줄리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고, 의 표정은 더 단단하게 만들지.

- 실내(부엌)의 앰버: 난로, 촛불, 전구 같은 따뜻한 실내광을 남겨. 부엌의 열기와 생활감을 담당하는 빛이야. 다만 ‘로맨틱’하게 만들지 말고, 음식과 땀의 톤으로 유지해.

- 혼합광의 핵심: 두 빛이 인물 얼굴에서 ‘깔끔하게’ 섞이면 안 돼. 한쪽은 차갑고, 한쪽은 따뜻하게 갈라진 채 남아 있어야 해. 한 프레임 안에서 온도가 다르게 느껴지는 얼굴. 그게 이 작품의 관계야.

🔊 Sound: 위층의 축제는 멀어지고, 저택의 벨이 가까워진다

- 위층 춤곡: 위에서 들려오는 음악과 발구름 소리를 먹먹하게 깔아. 즐거움은 가까운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닿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시간이 갈수록 이 소리는 점점 사라져.

- 부엌의 생활 소리: 컵 부딪힘, 물 붓는 소리, 칼날이 식탁을 스치는 소리 같은 디테일을 가까이 둬. 이 작품은 생활의 질감이 비극을 끌고 가니까.

- 벨: 마지막에 백작의 귀가를 알리는 벨은 크게. 그 소리 하나로, ‘축제 시간’이 끝났다는 걸 관객이 바로 이해해야 해. 도망칠 시간도, 숨을 시간도 없다는 신호니까.


백야의 부엌, 추락한 귀족 : 백야의 푸른 새벽빛이 스며드는 19세기 저택 지하 부엌에서, 무너진 귀족 여인(줄리)은 의자에 앉아 있고 면도칼을 든 하인(장)이 차가운 푸른빛과 따뜻한 불빛 사이에서 긴장감 있게 서 있는 비극적 장면.


4. Editor’s Note: 새벽은 ‘다시 시작’이 아니라, ‘정산’ 일 때가 있다

줄리는 높은 곳에서 내려왔고, 은 낮은 곳에서 올라가려 했어. 둘의 욕망은 서로를 끌어당겼지만, 저택의 규칙은 그걸 오래 허용하지 않지. 『미스 줄리』의 비극은 결국 '누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결정 돼. 그 집의 질서가 늘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축제라는 핑계로 잠깐 느슨해졌을 뿐, 새벽이 오면 규칙은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그래서 이 작품의 새벽빛은 ‘희망’이 아니라 ‘정리’에 가운 것 같아. 밤에 흩어진 것들이, 아침엔 형태를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야. 줄리의 얼굴과 드레스가 그 빛 아래서 더 선명해지는 이유도 그거야. 숨길 수 있는 시간이 끝났다는 신호. 그 한 컷을 정확하게 남기면, 이 비극은 설명 없이도 충분히 전해지지 않을까.

 

[Scene Keyword]

August Strindberg, Miss Julie, Midsummer Night, Midnight Sun, Kitchen, Class Conflict, Mixed Lighting, Blue Hour, Razor, Naturalism

 

 

 

작품 : August Strindberg, Miss Julie (희곡)
※ 본 글은 장면 해석·비평 목적의 오리지널 콘텐츠이며, 원문 인용은 최소화했습니다.
※ 본 글은 희곡 분석 및 연출 연구를 위한 비평 콘텐츠이며, 위해 행위를 조장하거나 구체적 방법을 안내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