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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센8

[Scene #51] 다리오 포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우연한 죽음』 : 권력을 조롱하는 광각(Wide Angle)의 왜곡과 창문의 역설 1. 프롤로그: 코미디가 뉴스보다 더 또렷할 때방송을 보다보면 NG모음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잖아. 난 그거 보는게 그렇게 재미 있더라고. 나 역시 편집을 하다 보면 촬영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튀어나온 NG장면들 보면 나만 보기 아까워서 항상 영상 끝에 모아놓곤 했었어. 보통 대사나 동작이 틀렸는데, 그 순간 사람의 반사신경이 그대로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지. 누가 책임을 피하려고 먼저 말을 던지고, 누군 얼버무리며 웃고, 누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그 몇 초가, 잘 다듬어진 ‘OK’보다 훨씬 많은 걸 말해줄 때가 있어. 다리오 포의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우연한 죽음』은, 권력의 말실수와 변명, 말 바꾸기가 한 장면씩 쌓여서 스스로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동극이야. 배경은 경찰서. 조사받던 .. 2026. 1. 12.
[Scene #39] 피터 쉐퍼 『에쿠우스』 : 원시적 본능을 깨우는 제의적 조명(Ritual Lighting)과 금속성의 질감 1. 프롤로그: 너의 신은, 지금 어디에 숨겨져 있나?언제부터인가 '영포티'라는 용어가 안 좋은 의미 또는 긁는 의미로 변질되었더라고. 나이와 상관 없이 젊음을 유지하려는 의지가 왜 이렇게 놀림의 대상이 되었는지 한동안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있어. 우리가 ‘어른답게’ 산다는 말 속에는, 사실 ‘너무 뜨겁지 말 것’이 함께 들어 있는 것 같아.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는 표정, 심장이 먼저 달려가는 선택, 누가 봐도 좀 과하다고 할 만큼의 몰입 같은 것들. 한때는 그게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 뜨거움이 자꾸 ‘관리’의 대상이 되잖아. 적당히 눌러두고, 적당히 숨기고, 적당히 말끔한 얼굴로 정리해 버리는 식으로 말이야. 그런데 『에쿠우스』는 그 눌러둔 뜨거움이 어느 날 신처럼 솟구치면 어떤 .. 2026. 1. 6.
[Scene #38]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 : 폭풍우 속의 '벌거벗은 인간', 그 제로 포인트(Zero Point)의 미장센 1. 프롤로그: 명함이 사라진 뒤에도, 너는 너로 남을 수 있을까2026년 새해에는 무엇을 쌓고 있어? 쌓지 못한 것들? 혹은 쌓여 있으나 더 쌓아야 할 것들...? 예를 들면 직함이나 경력, 통장 잔고, 집의 크기, 팔로워 숫자 등. 아, 내가 이 말을 꺼내는 건 그게 나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야. 그 덕분에 버티는 날도 많으니까. 다만 가끔은 말이야, 그 모든 게 ‘나’의 중심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서, 오늘 살펴볼 작품과 함께 생각해 보면 어떨까 해서. 만약 어떤 밤에, 그 중심이 통째로 사라져 버린다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 있어? 내 이름 앞에 붙은 직함이나 호칭들이 사라지고, 내가 내세우던 배경이 한 장씩 떨어져 나가고, 결국 남는 게 ‘살아 있는 몸’ 하나뿐이라면. 그때도 우리는 스스.. 2026. 1. 5.
[Scene #37] 장 주네 『하녀들』 : 거울 속의 연극놀이, 반사(Reflection)와 왜곡된 자아의 미장센 1. 프롤로그: 너는 오늘, 어떤 얼굴로 살아남았어?가끔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이 어색할 때가 있지 않아? 나는 특히 영업일을 할 때 더 그랬던 것 같아. 상대방의 비위를 맞춰 주느라 하루 종일 웃고, 고개를 끄덕이고, 적당히 맞춰주다가 집에 와서 불 꺼진 화면에 비친 얼굴을 보면, 내가 방금까지 '나'의 모습이었는지, 혹은 '가면'의 모습이었는지 갑자기 낯설어지는 순간이 오더라고.나만 그런건 아니지? 결국 우리는 일상 속에서 '상황마다' 다른 역할을 갈아입고 살잖아. 문제는 한 역할을 너무 오래 끼고 있으면, 어디부터가 가면이고 어디까지가 내 진짜 피부였는지 잊어버린다는 거지. 장 주네의 『하녀들』은 그 지점까지 밀어붙이는 작품인 것 같아. 이건 계급 이야기이기도 하고, 욕망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나는 .. 2026. 1. 5.
[Scene #10] 차범석 『산불』 : 대나무 숲의 명암 대비(Contrast)와 인간의 본능을 상징하는 붉은 조명 미장센 1. 프롤로그: 이념은 옷, 본능은 피부요즘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아. 뭐냐면,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주의(-ism)’와 싸우잖아? 정치색, 사회적 신념, 갈라 치기 같은 것들 말이야. 겉으로는 거창한 명분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극한 상황에 닥치면 사실, 인간은 되게 단순해지지. 배고프면 밥을 찾고, 추우면 불을 찾고, 외로우면 체온을 찾잖아? 그러니까 명분은 겉옷이고, 결국 우리를 밀어 움직이는 건 피부에 달라붙은 본능이더라는 거지. 차범석의 『산불』은 한국전쟁이라는 가장 비극적인 배경을 깔고 있지만, 잘 보면 단순한 전쟁극은 아니야. 오히려 재난 스릴러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지독하게 멜로 같아. 남자들은 죽거나 끌려가고, 여자들만 남은 산골 마을. 그곳에 숨어든 한 명의 .. 2025. 12. 22.
[Scene #05] 헨릭 입센 『인형의 집』: 완벽한 거실의 균열을 포착하는 대칭 구도(Symmetry)와 차가운 색온도 분석 1. 프롤로그: 완벽하게 세팅된 무대 위에서가끔 SNS를 보다 보면 기분이 묘해질 때가 있지 않아? 완벽할 정도로 잘 정리된 거실, 그림처럼 차려진 예쁜 식탁, 언제나 늘 웃고 있는 커플사진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사진들 말이야.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저 사진 밖의 진짜 공기는 어떤 온도일까?' 셔터가 눌리기 직전까지 누군가는 지쳤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참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저마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무대를 꾸미고, 그 무대가 오래 갈수록 무대가 현실을 이겨먹기 시작하는 것 같아.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보여야 하는 삶’이 더 우선이 되는 순간이 오거든.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은 그런 의미에서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완벽한 거실'이 아닐까.. 2025. 12. 20.